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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빚은 찹쌀떡 백리 밖의 손님을 부르다.
2013-11-06 12865
권명화 할머니에게 찹쌀떡은 험한 세상 잘 살아왔다고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그것도 뒤늦게 받은 선물이다.
예순에 찹쌀떡을 빚는 일은 인생을 담는 일이고, 일흔에 찹쌀떡을 빚는 일은 이승에 남겨둘 영혼을 담는 일이다.
그래서 '권명화찹쌀떡'에서는 오래된 맛과 내음이 배어나는가 보다.
'권명화찹쌀떡'을 처음 먹어 본 것은 작년 추석 때였다. 장모님이 맛있다면서 추석선물로 가족들에게 돌렸던 것이다. 처음에야 그저 흔한 찹쌀떡이려니 했는데, 한번 먹어보니 엄지손가락이 절로 세워졌다. 말랑하면서도 잘근잘근 씹히는 떡 살 맛에, 입 안 가득 으스러지는 후한 통팥 소는 그야말로 어린 시절 시루떡에서나 맡아봤을 법한 팥 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껴 먹으려고 사람들 손을 피해 얼른 뚜껑을 닫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다음날 저녁에 생각이 나서 한 개를 꺼내들고 입에 물었더니 웬걸 벌써 밭에서 쉰 냄새가 난다. 그제야 첨가물이 일절 안 들어갔으니 반드시 냉동보관하라는 주의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사람들 손을 물리쳤던 일이 후회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냉동실 한편은 늘 '권명화찹쌀떡'이 차지하게 되었다. 주변에 누가 선물이라도 할라치면, 가격대비 최고의 선물이라며 적극 권유하곤 했으니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좋은 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알려지나 보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정작 취재할 생각은 못했는데, 안내장에서 '60년 전 초등학교 때 배운 방법 그대로 만드는 찹쌀떡'이라는 문구를 보면서, 권명화 할머니를 만나 찹쌀떡에 얽힌 사연을 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명화찹쌀떡'은 화성시에서도 외진 매송면 송라리 동네 어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권명화 할머니는 시집을 와서 평생을 살아왔던 집에서 찹쌀떡을 만들기 시작했고, 지금도 이곳에서 찹쌀떡을 만들고 있다. 안채는 할머니 살림집으로 쓰고 사랑방을 비롯한 바깥채는 찹쌀떡 공장으로 증개축한 것이다. 그리고 장남인 이석균 대표가 합류하여 구입한 아래채는 떡 카페로 리모델링해 찹쌀떡을 판매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 외에는 유동인구가 없는 마을 어귀이니 상권으로 따지자면 거의 가치가 없는 셈이다. 그야말로 먹고 싶은 사람이 물어물어 찾아와야 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취재하는 중간 중간 차들이 들이닥친다. 이석균 대표는, 주로 전화 주문이 많지만 직접 사러 오는 고객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요즘에는 보통 하루 3천 개 정도가 판매되는데 오후 세 시면 물량이 다 빠지기 때문에 허탕치고 돌아가는 고객들도 많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 1시면 일어나
팥소를 졸이는 할머니

고목이 느껴졌다. 한 자리에 버티고 서서 온갖 풍상을 묵묵히 이겨낸 뒤라면 세상에는 더 이상 큰 일도 놀랄 일도 없다. 버티어 선 듯 작은 키와 지근한 눈빛을 지닌 권명화 할머니에게서 그러한 굳건함이 느껴졌다.
"찹쌀떡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팥을 끓여 팥소를 만드는 일이에요. 한 달 전 아들한테 주걱을 맡겼다가, 얼마 전에 다시 찾아왔어요."
할머니가 찹쌀떡을 만들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이 팥소이다. 매년 좋은 국산 팥을 골라서 수매하고, 지금도 직접 다섯 시간 이상 끓이고 졸여서 팥소를 만든다. 늘 일정한 맛을 내는 팥소는 계량화된 방법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해 생산된 팥의 품질, 소금의 간수가 빠진 정도, 계절, 날씨 등에 따라 물이나 소금, 설탕의 양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만드는 사람이 감각을 동원해 그때그때 최고의 팥소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석균 대표로서는 어머니가 평생을 익혀온 감각을 단 몇 달 만에 배우기는 무리였던 것이다.
권명화 할머니는 새벽 1시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큰솥 다섯 개에 통팥을 삶는다. 세 시 무렵이면 이석균 대표를 비롯해 '권명화찹쌀떡'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찹쌀을 빻고 찌며 찹쌀떡 빚을 준비를 한다. 보통 새벽 3시부터 본격적으로 찹쌀떡을 빚기 시작해서 1인당 7,8백 개를 빚는데, 오전 10시쯤 되면 대충 일이 끝난다. 새벽 1시에 일어난 권명화 할머니도 찹쌀떡 빚기가 끝날 때까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다. 일흔두 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이다.
"명절이나 수능시험 때는 일주일 밤새워 작업하는데요. 4~5일 밤새우면 다들 정신을 못 차려요. 그때 어머니가 '나 같은 노인네도 끄떡없이 하는데 젊은 애들이 그 모양이냐' 그러면 다들 할 말이 없어요."
이석균 대표는 어머니를 독한 분이라고 한다. 일하는 것을 보면 주변에서 혀를 내두른다. 무리하게 일하다 보니 허리 수술을 네 번이나 하게 되었다. 보통 허리수술 한번 받으면 누구라도 힘든 일을 다 내려놓기 마련인데, 움직일 수 있겠다 싶으면 일에 매달리다보니 무려 네 번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권명화 할머니이다.
찹쌀떡, 혼담을 성사시키다
권명화 할머니는 찹쌀떡을 초등학교 5학년 실습 시간 때 배웠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았던 할머니는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집안 잔치나 명절이면 직접 찹쌀을 찌고 팥소를 졸여서 찹쌀떡을 선보였다. 먹어 본 사람들은 다들 맛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잔칫날이나 명절날 권명화 할머니가 만든 찹쌀떡은 집안의 별미로 자리잡았다.
그 찹쌀떡이 할머니의 결혼에도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혼기가 차서 혼담을 주고 받을 때였다. 그 때만 해도 시댁될 곳은 부농이었고 할머니 댁은 내 세울 게 없었다. 시아버지 될 어른은 그런 며느릿감이 탐탁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혼담을 주고받기 전에 시아버지가 먼저 며느리를 선보겠다며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 그때 권명화 할머니는 장래 시아버지가 될 분에게 무얼 대접할까 고민하다가 본인이 잘하는 찹쌀떡을 만들었다. 보기 좋게 내어온 찹쌀떡을 시아버지는 유심히 살피더니 한입 베어 물었다. "이 정도면 됐다." 시아버지는 찹쌀떡의 정갈한 모양새와 맛에 두말없이 며느릿감으로 받아들였다.
작은 키에 가난한 집 딸이었던 권명화 할머니는 시댁에 책잡히고 싶지 않았다. 무려 13명의 대가족인 시댁에서 잠시도 엉덩이 붙일 틈 없이 일했다. 시누와 시동생 다섯에게 새벽밥을 해가며 뒷바라지했고, 시어른들을 모시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바지런했던 그이는 농사면 농사, 음식이면 음식, 옷이면 옷, 못하는 것이 없었다. 동네에서는 며느리 잘 들어왔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마흔이 되던 해에 집안에 우환이 연이어 닥쳤다.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아버지 마저 중풍으로 몬져눕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권명화 할머니는 슬하의 삼남매만을 바라보며 거친 세월을 살아내야 했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논으로 나갔어요. 아홉 마지기나 되었으니 피를 뽑으려고 허리를 굽히면 사람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어요. 새벽에 논에 나가면 밤늦게나 돼서 들어왔어요. 그때는 일이라도 부여 잡고 있어야 넘어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집안의 기둥이 모두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절망스러운 시절, 그는 일 속에 모든 원망과 한탄과 두려움을 털어 넣었던 것이다.
"그 당시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저도 학교 파하면 어머니를 도와야 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다른 논에는 이렇게까지 피를 철저히 뽑지 않는데'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여튼 어머니는 일을 하면 완벽해야 했어요. 논두렁도 풀 하나 없이 반질반질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석균 대표는 지금도 농사일만 떠올리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절대 대충대충 하는 법이 없고 한번 시작하면 완벽할 때까지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했으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꼬박 5년 동안 농사를 지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다른 일자리를 찾던 끝에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방수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여자가 공사판에 일을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권명화 할머니는 여자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빈틈없이 해냈다. 나중에는 공사장 반장까지 하면서 무려 13년간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주변에 세워진 아파트 중 할머니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로 무릎이 불편할 때도 두 손으로 계단 난간을 잡고 25층을 오르내리며 독하게 일했다. 일에서는 신뢰를 얻었지만 대신 몸이 무너졌다. 무릎은 물론 허리까지 아파와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되었다. 디스크 수술을 두 번 하고는 더 이상 공사장에 나갈 수 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쉬는 동안에도 부지런한 천성은 어딜 가지 않아 집안 주변 텃밭을 가꾸었다.


60살에 첫 주문을 받다.
"올케, 예전에 먹었던 찹쌀떡 한 말만 해줄 없나요? 우리 아파트 모임에서 놀러갈 때 가져가려고요. 전에 맞춰 먹던 집이 이사를 가서 그러니, 올케가 한 번만 해주세요."
뜻밖에 찹쌀떡 주문을 받게 되었다. 시누가 명절, 잔칫날 먹었던 맛있는 찹쌀떡을 떠올리며 권명화 할머니에게 전화했던 것이다. 마침 몸이 근질근질했던 그이는 배낭을 짊어지고 시장을 다니며 찹쌀이며 팥을 사서 지고 왔다. 꼬박 밤을 새워서 팥을 졸이고, 찹쌀을 찌고 해서 찹쌀떡을 빚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찹쌀떡 장사로 나서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누 부탁이니 정성을 다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간 찹쌀떡은 그야말로 대호평이었다. 찹쌀떡을 맛본 사람은 행사가 있을 때면 권명화 할머니를 찾았다. 찹쌀떡 판 돈으로 다시 시장 가서 찹쌀하고 팥을 사서 찹쌀떡을 만들어 갖다 주는 식이었다. 권명화 할머니 나이 예순일 때였다.
찹쌀떡 만드는 일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그 당시 모든 과정을 집에서 해 팥소 만드는 데만 일고여덟 시간이 걸렸으니 주문을 받은 날은 밤을 꼬박 새우기가 일쑤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오늘날처럼 키우지 못했을거예요. 어미니였으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무려 4~5년을 돈은 안 되고 몸은 고된 일을 버텨냈으니까요."
찹쌀떡은 양이 많든 적든 팥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비슷하게 걸린다. 그러니 하루나 이틀에 한 건씩 주문이 들어오면, 매일 밤을 새우게 된다. 배낭을 짊어지고 재료를 구입하는 일에서부터, 완성된 떡을 또 다시 배낭에 넣어서 배달하는 일까지 할머니가 직접 했으니 쉴 시간이 없었다.
"찹쌀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몇 년 간은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못 잤어요. 잠이 부족해서 꾸벅꾸벅 졸면서 찹쌀떡을 빚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힘들여 만든 것을 다들 좋아해주고 자꾸 주문이 들어오니 신이 났던 거죠."
아무 상표도 없고, 포장지도 없이 그때그때 모아 두었던 와이셔츠 박스 같은 데 담아서 배달했지만, 먹어본 사람은 그 맛에 빠져들었다.
찹쌀떡 일은 그 당시 함께 살고 있던 여섯 살 위의 시누와, 열 살 많은 언니도 함께 했다. 자연히 세 노인네가 국산 재료만으로 고집스럽게 만드는 찹쌀떡이라는 소문이 났고, 주문량은 늘어났다. 2~3년쯤 지나면서는 마치 중간 도매상처럼 각 지역에서 주문을 맡아주는 사람들이 저절로 생겼다. 그 사람들이 그 지역의 주문을 맡아서 일주일에 몇말씩을 할머니에게 주문했다. 세 노인네가 배낭을 메고 부지런히 다녀야만 했다. 그때는 수익도 늘어나 평생에 만져보지 못하던 돈을 만지게도 되었다.
맛이 변하면 고객이 먼저 알아봐요
주문이 늘어나면서 회사를 다니던 장남이 회사를 그만두고 찹쌀떡 만드는 일에 합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표, 제조원, 연락처도 없이 흰 찹쌀떡만 배달되고 있었다. 이석균 대표는 찹쌀떡의 브랜드, 포장지, 주문처 등 찹쌀떡에 걸맞은 옷을 입히기 시작했고, 지금의 예쁜 선물용 옷을 입은 '권명화찹쌀떡'이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전철을 타고 주변 지역에 배달하던 데서 지금은 전국으로 주문배송이 가능하도록 했다.
처음 5년 동안은 '권명화찹쌀떡'이 베일에 가려진 채 세상에 소개되었던 셈이다. 그 무명의 찹쌀떡을 찾는 사람들이 매년 늘어났고, 지금은 전국에서 찾는 제품이 되었다. 권명화 할머니의 맛에 대한 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에서야 찹쌀을 가공할 설비를 다 갖추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찹쌀은 방앗간에서 가공했다.
"한번은 새벽 두 시쯤 됐나, 어머니가 방앗간에서 준비해온 떡 살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바닥에 냅다 내동댕이치시는 거예요. 이것도 떡이라고 해왔냐며 당장 방앗간 사장을 부르라고 노발대발하는 거예요. 그때가 새벽 두시였는데, 어머니가 화내면 어쩔 수 없어요. 곧바로 방앗간에서 달려왔고 한참 훈계를 들어야 했지요."
팥소를 만들다가도 약간이라도 맛이 미치지 못하면, 애써 만든 팥소를 동네 경로당에 돌린다. 모두 국산 재료를 쓰지만 수매한 재료 중 품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국산 농산물 가격이 계속 오르다보니 어느덧 찹쌀떡 가격에서 재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나 된다고 한다.
"맛이 변하면 제일 먼저 먹는 사람이 알아봐요. 멀리서도 우리 찹쌀떡을 찾는 것은 그만큼 변치 않는 맛 때문일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맛만은 지켜야지요."
찹쌀떡 맛을 지키기 위해서는 재료를 희생할 수 없다. 만드는 방식도 완전 자동화는 불가능하다. 이석균 대표가 어머니 건강 때문에 어떻게든 기계화해 보려고 했지만, 팥소와 찹쌀떡 빚기는 기계화하면 맛이 현저히 떨어졌다. 자연히 몸과 정성을 바쳐야 한다. 새벽 1시면 권명화 할머니가 일어나 팥소를 준비하고 새벽 3시면 이석균 대표를 비롯한 전 직원들이 새벽을 밝힌다. 일요일도 쉬지 않고 1년 365일 반복되는 일과이다. 한번은 이석균 대표가 일요일은 쉬는 게 어떻겠냐고 권명화 할머니에게 제안했다가 혼쭐이 났다. 살 만하다고 마음이 해이해졌느냐는 것이다.
"누구라도 일평생 행복할 수는 없어요. 한번은 힘든 시기가 와요. 힘든 시기가 왔을 때 잘해야 해요. 저는 그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던 것 같아요. 겉으로 내색 한 번 안하고 말이죠."
권명화 할머니는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고 한다. 숱한 절망과 고통을 마음속으로 삭였지만 밖으로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안으로 삭이고 삭였던 것이 마침내 찹쌀떡으로 빚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찹쌀떡을 빚는 권명화 할머니를 보고 있자며, '온몸으로 찹쌀떡을 빚는 것이란 저런 모습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는 신명마저 깃든다. 그리고 온몸으로 빚는 것, 이것은 모든 것이 기계화되는 시대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이지 싶다.
올해 일흔두 살인 권명화 할머니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찹쌀떡을 빚고 싶다고 한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면서 그 세월을 온전히 받아낸 사람은 정신이 살아난다. 정신이 앞서고 몸이 뒤따르는 사람은 비로소 일과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일속에 혼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도 권명화 할머니는 두 손을 부지런히 놀려 떡 살 속에 팥소와 혼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글. 사진 _ 권순석 (sunnykwm@gmail.com)
행복한사람_권명화님 : pdf 보기
 
“어머니가 손수 빚은 전통 찹쌀떡 맛 전하고파” - 전통의 맛 이어가는 ‘권명화 찹쌀떡’
가족 생각하는 어머니 마음이 입맛 감동 지역명물 탄생시켜